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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떻게 보내셨어요?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습니다. 에어컨 없이도 여름나기에 괜찮은 집이었습니다. 아파트 뒤편으로 저수지가 있어서 앞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두면 맞바람이 제법 시원하게 치거든요. 매해 얼마간 열대야가 찾아왔지만, '여름은 더운 거니까' 그럭저럭 견딜만 했어요. 그러나 2-3년 사이 여름은 무척이나 괴로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오늘 진짜 덥다", "올해 진짜 덥다"라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씩 새어 나왔고 각자 코앞에서 선풍기를 쐬며 기진맥진 지내는 날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기분 탓이 아닙니다. 2018년 올해 폭염 일수가 31.5일이었다고 합니다. 한 달이 넘는 폭염이라니. 역대 최장 일수를 기록했습니다. 평균 폭염 일수를 찾아보니 1990년대는 10.8일, 2000년대 10.4일이라고 합니다. 제 어린시절의 기억으로는 극도로 더운 날이 10일로 끝나야했는데, 그보다 3배나(!) 더 많았던 것이지요.
관련기사 → 올여름 열대야 17.7일… 최고치 경신

대프리카 아니라 서프리카?
저희 오빠는 대구에 살고 있어요. 대구에서 맞는 첫 여름이라 더위의 강도가 높아지자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덥길래 '대프리카'라고 불릴까요? 몇 번 안부 문자를 보냈는데 의외로 지낼만하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공기가 덜 덥게 느껴진다면서요. '거참 이상하네'라고 생각했는데,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온 김진애 박사 말에 의하면 대구가 1996년부터 나무 심기를 하는 등 '찜통 도시'의 오명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 결과 이제는 최고 기온 도시 상위권 목록에서 사라졌다고 하네요.

이러한 <푸른 대구가꾸기>는 도시열섬현상과 폭염을 완화하고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한 사업으로 그동안 총 3천677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담장을 허물어 빈 공간에 나무를 심고, 가로수는 3열로 심는 등 아주 적극적으로요.
관련기사 → [대프리카의 여름] ② 1도라도 더 낮춰라…갖가지 폭염 대응법

출처 Urban heat islands: cooling things down with trees, green roads and fewer cars (The Guardian)


우리가 한 번은 봤을 법한 도심숲의 효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열화상카메라 사진입니다. 뙤약볕에 달아오른 아스팔트는 붉은색,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곳은 파란색을 띱니다.

장기 폭염 사태가 단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가운데 프랑스 '파리 회복력 계획(Paris Resilience Strategy)'에서 2040년까지 파리에 있는 800개 학교 모두의 아스팔트를 제거하고 녹지공간으로 전환하는 사업을 담았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 [MBC 앵커의 눈] 빌딩 대신 숲을, “나무는 도시의 에어컨”

알면서도 모른 척? 모르면서 아는 척?
나무와 숲에 대한 글을 찾아 읽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책들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활동으로 지구는 뜨거워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펭귄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도 위태롭다'라고 그저 상식처럼 말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제야,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30일이 넘는 폭염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기후변화는 절실한 '나의 일'이 되었습니다.
관련기사 → [조천호의 파란 하늘] 산업혁명 이후 평균기온 1도 상승했는데…폭염 잦아진 이유는?



전시를 열기로 했습니다.
'균형 시리즈;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 a series of balance)'를 대표 작품으로 정했습니다. 장 지오노가 실화를 바탕으로 쓴 단편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 수십 년 동안 황량한 땅에 묵묵히 나무를 심어 풍요로운 숲을 만든 한 사람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사람 손에 도끼를 쥐여준다면 내용은 반대가 되겠지요.


'2016년 균형 달력'의 형태를 유지하되 재료와 공정에 변화를 주어 '2019년 균형 달력'을 제작했습니다.

우선 전시 대표 작품인 '균형 시리즈; 엘제아르 부피에(Elzeard Bouffier; a series of balance)'의 이미지를 넣었습니다.
나무 이야기를 담았기에 최대한 새로운 종이를 사지 않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작품 이미지가 들어가는 두꺼운 종이는 인쇄 과정에서 나오는 파지/폐지와 인쇄 후 인쇄소가 보관하고 있던 잉여 종이를 받아와 활용하였습니다.
하단의 열두 달 부분은 기존의 FSC 인증 종이 외에도 대나무 종이, 해초 종이 등 비목재 펄프 종이, 얇은 재생지, 이면지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해 사용자가 직접 만지고 사용하며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인쇄소의 커다란 기계로 압력을 주어 찍었던 과정 역시 직접 인쇄하는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리놀륨 판화, 실크 스크린 등을 실험해보았고 이보다 간단한 레터프레스 기법으로 소량씩이나마 직접 찍을 수 있었습니다. 절취선을 넣고 재봉틀로 제본하는 것은 전과 같습니다.

균형 달력, 좋아은경, 2018

 

​희망은 지표면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라난다.
숲과 산과 강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상적인 투쟁에 나선 사람들의 어깨동무 안에서 자라난다.
아룬다티 로이, 2010

 

전시 제목은 Trees Protect (  ) 입니다.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인용된 아룬다티 로이의 글에서 생각의 전환을 맞았습니다.

"숲과 산과 강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 they know that the forests, the mountains and the rivers protect them)". 나는 이제껏 정반대로 생각하고 말해왔구나, 숲이 있어서, 강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로구나, 문장을 여러번 곱씹으며 꽤 한참을 멍하게 지냈습니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어서 말합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세계를 재창조하는 첫걸음은, 특별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의 절멸을 막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상상력, 무엇이 행복이고 충족인지에 대해 전혀 다른 관념을 드러내는 상상력 말이다. 이러한 철학적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의 수호자들이 존속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용인해야 한다. 실제로 이들은 우리에게 미래의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시월 한 달, 이음에서 만남을 청합니다. 저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매일 전시장에 나와 제 자리를 지킬 예정이고, 전시는 날을 이어가며 조금씩 변화할 것 같습니다. 찾아주시는 누구나 편안히 오래 머무르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우리의 지나치게 뜨거웠던 여름에 대해, 우리 모르게 서늘한 공기를 실어 보내주었던 나무에 대해, 내일을 위한 특별한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요.

고맙습니다.
좋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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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은경 오픈 스튜디오

TREES PROTECT (     )

2018.10.1-10.31 월-토 1pm-10pm
책방이음 갤러리 서울 종로구 대학로14길 12-1
작가와의 대화 10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