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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여지와 마음의 깊이를 만들어 주는 자연을 닮은 잡지, 해피투데이 2017년 2월호 (Vol.78)에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제목처럼 <따뜻한 인터뷰>, 감사한 마음으로 일부 옮깁니다.

 



월간 해피투데이 2017년 2월호 <따뜻한 인터뷰>
녹슨 철사로 생명의 존엄을 일깨우는 사람 철사 아티스트 김은경
인터뷰
김미경
사진 장은주

1962년 출판된 <침묵의 봄>은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환경고전이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작가인 레이첼 카슨은 누구도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시절, 이 책을 통해 DDT 등 유독성화학물질의 무분별한 사용에 의한 지구생태계 파괴를 경고했다.
작년 여름, 나는 '아시아의 평화와 환경을 위한 항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아시아의 바다와 기항지를 누비는 피스앤그린보트에서 레이첼 카슨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를 만났다.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철사를 구부려 작은 새 모양의 반지를 만드는 수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땅이 오염되면 땅에 살고 있는 지렇이도 오염되고, 그 지렇이를 먹는 새도 오염돼서 죽게 돼요. 봄이 와도 소란스러운 새의 지저귐을 들을 수 없어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이 삐뚤빼뚤하게 완성한 흰배지빠귀와 주홍울새와 동고비는 환경보전의 가치를 담은 뜻깊은 작품이 되었다. ... 한 올의 얇은 철사를 통해 레이첼 카슨의 거대하고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던 그녀가 배에서 내린 뒤에도 종종 생각났다. 철사 아티스트라는 독자적인 타이틀을 달고 여전히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만남을 청했고, 스리랑카에서 갓 돌아왔다는 그이를 서울현대미술관 앞에서 만났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손에 꼭 쥐고서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를 뛰쳐나온 여고생, '그린 디자이너'를 만나다 

 

철사로 작은 새를 만드는 선내 프로그램이 꼬마들은 물론이고 어른들한테도 인기가 많았잖아요.

선내에서 예정된 세 번의 워크샵 외에도 갑판, 복도, 방에서 게릴라 워크샵을 열었어요. 만드는 기쁨이란 게 되게 좋은 거잖아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들기도 하구요. 만들어낸 것이 쓸모가 있든 없든 일단 과정이 재밌고, 자기 안의 불꽃으 피워주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어요?

정말 많아요. 워크샵을 할 때 마다 인상 깊었던 반응이 한 팀에 한 명 이상은 꼭 나와요. 저를 불러주는 곳에서 정식 워크샵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 외에도 'WWW(Whenever Wherever Workshop)' 또는 '언제 어디서나 워크샵'이라고 제가 이름 붙인 게릴라 수업을 수시로 열거든요. 보시다시피 지금도 이렇게, 그리고 항상 철사와 니퍼를 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다양한 새 사진을 보여준 후에 마음에 드는 새를 하나 골라서 여러 번 따라 그리고, 그게 손에 익으면 철사로 자기가 그린 새 그림을 형상화하면 돼요. 아이들은 되레 자신감 있게 하는데, 어른들은 처음에 좀 겁을 내요. '에이 난 구경만 할게요', '그림 배운 적이 없어서 못해' 하시면서요. 저는 '각자가 고른 새가 다르기 때문에 새 모양이 다 달라도 이상한 게 아니다. 날 위해서 만드는 거니 그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면 된다'고 얘기해요. 그렇게 만들기를 시작하고 나면 '못한다'고 하시던 할머니도 즐거워하시고 나중에 손자들 보여주겠다고 성경책 이런 데 곱게 끼워서 가져가세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 뿌듯하죠.

 

저는 '철사 아티스트'라는 호칭을 처음 들어 봤어요.

 

그런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엔 저밖에 없을 거예요. 제가 미술 비전공자라서 그런 것 아닐까요? 금속공예 하시는 분들도 철사와 같은 메탈을 쓰지만, 두꺼운 금속을 써서 용접을 넣고 하면 그건 철사의 범위를 넘어서니까요. 저는 아직까지는 용접 같은 걸 안 하고 집에 있는 간단한 도구를 써서 철사 선으로만 만들다 보니까 철사 아티스트라고 불리게 된 것 같아요.

 

'그린 디자이너'로 유명한 윤호섭 교수님과의 인연이 깊다고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중3 때 환경운동가라는 직업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직업이 있구나' 하고 어린나이에 나름 충격을 받고 책이나 인터넷 매체를 통해서 환경운동가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그러다 TV에서 윤호섭 교수님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이 좋은 곳으로 바뀌는 데 기여를 한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어요. 방송을 본 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찾아가 윤 교수님을 처음 뵙고 사인을 받았죠.

 

역시 똘똘한 청소년이었네요.(웃음)

 

교수님은 매년 여름 일요일마다 인사동거리에서 천연 물감으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주고 사람들과 환경에 대해 소통하는 행사를 펼쳐오고 계세요. 2003년도 여름에 교수님이 수집하고 계셨던 비닐 달린 창문 봉투를 모아서 가져다 드릴 겸 티셔츠에 그림도 받을 겸 인사동에 갔는데,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얼마예요?' 하고 물었어요. 저는 인사동 퍼포먼스의 의미를 알고 갔으니 그분들에게 '파는 게 아니고 집에서 안 입는 헌 티셔츠를 가져오면 천연페인트로 그림을 그려주신다'고 설명을 해주었고, 자연스럽게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매주 일요일 인사동에 나가 설명으 하게 되었어요. 첫 해에는 윤 교수님과 따로 대화를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중에 여쭤보니 '미술대 학생이나 추천서 받으러 온 고등학생이겠거니' 하셨대요. 대학교 진학 후에도 시간 나는 대로 윤 교수님 연구실, 인사동, 전시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자연스럽게 찾아서 했어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윤 교수님이 계셨던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가 아니라 사회과학부를 전공으로 택한 게 의외로 느껴지는데요.

 

당시에는 미술이나 디자인을 진로로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였어요. 사회문제, 대안교육 등에 관심이 많아서 학과 진학에 구민이 많았는데 그때 <하자센터>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듣고 있었어요. <하자센터> 선생님 세 분과 면담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분들이 하나같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를 추천하셔서 그곳으로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어요. 윤 교수님이 계시는 그린디자인 대학원에 갈까도 했지만 '자네는 이미 졸업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더라구요. 졸업 후 2~3년쯤 장기여행을 떠날 계획도 세우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퇴임을 하시면서 제가 본격적으로 교수님 일을 맡게 됐고 그사이에 철사로 작품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레이첼 카슨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 

데뷔작이자 대표작인 '침묵의 봄'이라는 작품은 어떻게 탄생했나요?

 

윤호섭 선생님이 매년 친환경적인 절차로 달력을 제작하고 무료 배포하고 계세요. 3,000부 정도 제작하는데 다 나눠준 것 같아도 연말에 연구실에서 100부, 200부 묶음이 나오곤 해요. 분리 배출을 해야 하니까 않아서 철사를 뽑아내는데, 철사가 몽글몽글하니 되게 예뻤어요. 양이 상당히 많기도 하고. 그래서 대학원생들한테 이걸로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 제안했는데 아무래도 각자만의 화두가 있으니까 작품으로 이어지진 않았죠. 그러다 2012년 여름 무렵, 달력 위의 동그렇게 감긴 부분이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새의 다리 모양으로 연상되는 거예요. 즉시 달력의 철사 한 부분만 남겨놓고 풀어내 달력 위에 앉아 있는 새의 모양을 만들었고, 그 작품을 '그린캔바스'에서 주최하는 <녹색여름전>에 출품하게 됐어요. 처음엔 '새'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는데,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새가 등장한다는 것이 떠올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침묵의 봄'을 제목으로 택했어요. 그때부턴 교수님도 달력을 만들 때 용수철 제본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죠.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작품이 보다 큰 메타포를 지니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녹색여름전>에 워낙 좋은 출품작들이 많아서 정작 제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살필 겨를이 없었어요. 6개월 뒤 인문학 서점이자 대안공간인 <이음책방>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직접적인 반응을 체감한 건 그때였어요. 쓱 둘러보고 가시는 분도 있어지만 관심있게 둘러보는 분도 있었고, 오신 분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철사는 우리 집에도 있는데', '나도 생각할 수 있었던 건데' 하면서 놀라는 분들을 보니 만만하게 느끼는 소재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는 데에서 희열이 느껴지더라구요. 방문객들이 남긴 방명록을 보면서 '이걸 계속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전공자도 아닌데 위축되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는 게 대단하네요.

 

사실 개인전을 열 생각은 없었지만 윤 교수님이 권하기도 하셨고, 마침 그해가 <침묵의 봄> 출간 50주년이기도 했거든요. 돌이켜보면 교수님이 아이디어와 작품이 좋은 제자들에게 전시를 하라고 조언하셨는데 '전 아직 준비가 안 됐습니다'라는 반응이 많았던 것 같아요. '당겨야 나온다'는 게 교수님 표현이었는데, 줄처럼 끌어당겨야 좋은 아이디어가 계속 나온다는 말씀이셨어요. 제가 미술하는 사람은 아니어지만 교수님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어떤 씨앗을 봤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 텐데, 저 역시 '준비가 안 됐다'는 말로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길로 당장 <이음책방>에 가서 전시 제안을 드렸고, 흔쾌히 수락해주신 덕에 개인전을 치르게 된 거예요. 어렸을 때 제가 미술관에 가기 싫어했던 건 어렵고 짓눌리는 느낌, 강요당하는 느낌 때문이었어요. 그리기와 만들기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해왔던 거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 그런 건데, 미술이 점점 사람들로부터 멀어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사람들이 내 걸 보고 '나도 살 수 있겠네'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하는 작업이 어떤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제 전시는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침묵의 봄>은 언제 처음 읽었어요?

고등학교 그만두고 좋은 책과 고전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앞부분이 좀 어렵긴 한데 4장 이후부터 강이나 땅, 새에 관한 내용이 나오면서 굉장히 재밌어요. 레이첼 카슨 평전도 감명 깊게 읽었구요. 여성 인권이 매우 낮았던 시기에 이례적으로 고위 공무원직에 오른 사람이었고, 오빠의 처자식까지 다 먹여 살려야 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밤마다 글을 써서 전업 작가가 되었다는 게 존경스러워요. 그녀는 암 진단을 받고서도 장장 5년에 걸쳐 <침묵의 봄>을 집필했어요. 본인이 쓰고 싶어 했던 바다에 대한 책 대신 굉장한 문제작이 될 것이 뻔했던 <침묵의 봄>을 써서 죽기 전까지 대중과 언론과 과학자 집단과 화학업계와 맞서 싸워야 했어요. 카슨은 "<침묵의 봄>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그것은 마치 에이브러햄 링컨이 '저항해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외쳤을 때와 같은 의무감에서 비롯되었고"고 말했어요. 가시밭길이 될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는 게 굉장히 놀라워요.

 

 

 '균형'과 '공존'이라는 테마 

미술보다는 환경에 대한 관심 때문에 아티스트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환경문제에 천착하게 된 근본적인 계기가 있나요?

 

그건 엄마 영향이 커요.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보면 꼭 줍고, 항상 아껴 쓰고 절약하고 재활용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분이에요. 집이 잘사는 형편이 아니니까 그런 것도 있었지만 엄마가 깨어 있는 분이시라 책도 많이 읽으셨고, 제가 어린이였을 때에도 여러 사회문제에 대해서 엄마랑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나요. 엄마를 통해서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 본인을 '좋아'라고 소개했잖아요. '좋아은경'에 담긴 의미가 궁금해요.

 

그건 내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물론 밝은 부분도 없진 않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스스로를 그늘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학교를 그만두고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을 선물 받아서 읽게 됐는데 거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만날 때마다 "예스, 시화"라고 부르는 어느 구루 덕분에 열등감과 어두운 면이 가득했던 시인이 어느 순간 긍정적으로 감화되었다는 얘기였어요. 그 내용을 읽고서 나 역시 스스로를 '좋아' 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런 뒤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뀌고 되었죠. 이젠 친구들도 본명보다 그렇게 부르는 걸 더 편해 하구요. 그렇게 한 데엔 성씨에 담긴 부계 중심의 질서라든지 격식과 위계서열을 타파하고 싶은 마음도 담겨 있었어요. '언니'라든지 '씨'라든지 그런 호칭을 빼고 '좋아'라고만 불러주면 저는 제일 좋아요. '김은경'과 '좋아', 두 단어가 합쳐진 '좋아은경'을 작가명으로 쓰고 있지만 성씨가 붙어 있지 않은 이름에 불편함을 느끼는 어른들도 더러 계시긴 해요.

 

이름을 그렇게 부르면 모든 걸 보다 좋게 느끼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셈이죠. 제가 생태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서로를 자연의 이름으로 불렀어요. 새 이름이나 나무 이름으로요. 저는 예외적으로 '좋아'라고 하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부르면서 깔깔대면서 좋아하고.(웃음) 이름 자체가 주는 긍정적인 기운이 저뿐만 아니라 상대방한테도 간다고 생각해서 저는 되게 좋게 생각해요. 외국 나가서 부르기도 좋잖아요. 그들에게 제 이름의 뜻을 설명해주면서 한국에 가서 '좋아'라는 말을 하면 한국인들이 기뻐할 거라고 얘기해줘요.

 

앞으로 전개될 작품에 있어서 풀어나가고 싶은 키워드나 테마 같은 게 있나요?

제가 카슨에게 읽어냈던 건 '균형'과 '공존'의 테마였고, 앞으로도 그 주제에 집중하려고 해요. 제 작품 중 '산양이 사는 나라(Where the Wild Goats Are)'라는 게 있어요. 레이첼 카슨이 말한, 사람이 생태계의 균형을 깨면서 사라지게 될 생명체들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경우엔 산양이라고 저는 생각했거든요. 이 작품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으로 위기에 놓인 산양들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굉장히 비민주적인 절차로 이런 것들을 후다닥 치러버리려고 하는 행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해요. 포괄적으로 얘기하자면 '비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깨지는 것들'이 제가 다루고 싶은 주제인 거죠. 제가 '손'을 강조하는 작품들도 많이 만드는데, '오늘 내 손으로 무얼 했나' 돌아보는 것이 곧 나의 하루를 돌아 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거든요. 우리 손으로 이뤄낸 게 되게 많잖아요. 그렇게 자기 손의 가치를 돌이켜보고, 이 손으로 무엇을 할지, 앞으로 어떻게 쓸지, 크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일상 속의 작은 디테일에서 그 예를 찾아내 표현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