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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를 유독 힘들어하는 저는 겨울을 더운 나라에서 보내기로 했어요. 관광보다는 탈출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신세를 질 수 있는 친구가 몇 있거든요.

약속된 일정을 마치는 대로 떠나는 항공표를 급하게 구입하고 나니, 불현듯 저의 지난 여행들이 떠올랐습니다.


태국은 한국만큼이나 일회용품 사용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저는 여행지에서 굉장히 관대해집니다. 평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일회용 컵, 일회용 봉투 등을 받아 하루하루 쓰레기를 잔뜩 만들면서 각 나라의 삶의 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는 여행자라는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다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여행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빨대가 코에 껴서 고통받는 거북이, 페트병에서 나오는 고리가 부리에 껴서 굶어 죽은 새와 같은 사진을 정말 매일같이 보고 있어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많아질 것이고, 이미 우리가 먹는 미세플라스틱의 양이 일주일에 신용카드 한 장 정도라는 그런 이야기들이 평범하게 오갔어요.

그동안 재활용된 플라스틱이 고작 5%라는 수치를 접하기도 했어요. 5%라니! 저희 어머니는 아주 성실하게 분리배출을 하세요. (주로 식품 구입에서 발생하는) 종이, 유리, 플라스틱, 캔을 깨끗하게 나눠두었다가 목요일 아침에 아파트 단지에 마련된 배출장소로 가지고 나가요. 조그마한 플라스틱 조각까지 세심하게. 근데 그런 것은 재활용이 되지 않기에 폐기물로 종량제 봉투에 버리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그간의 수고는 다 어떻게 된 걸까요?

어느 외국의 해안으로 떠밀려온 죽은 고래 뱃속은 비닐봉지로 가득했어요. 아차, 그 중에 제가 버린 게 한 장은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어요. 제가 아무리 우주의 먼지 같은 사람일지라도요.

"현대적인 방식이 만들어낸 엄청난 쓰레기 처리 문제에 직면할 때면
……
우리는 과학의 안내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만 안 보이면 된다며
양탄자 밑으로 먼지를 쓸어 넣어 버리는
속담 속의 형편없는 살림꾼처럼 행동합니다."


레이첼 카슨, 잃어버린 숲


제가 바로 그 ‘형편없는 살림꾼’이라고 생각했어요. 쓰레기는 제 눈 앞에서 말끔히 사라졌지만 소각장으로, 매립지로, 강으로, 바다로, 그저 어딘가로 밀어낸 것일 뿐이니까요.

"일회용없이 여행을 해보자."
인스타그램에 형편없는 살림꾼(www.instagram.com/bad.housekeeper/) 계정을 열었습니다. 


완벽한 결과보다는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 의의를 두자고 되내었어요. 이 여정을 만점을 받고 패스해야 하는 시험으로 여기지 말자고, 왜냐하면 일회용품을 쓰지 않는 여행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과 ‘방법’이니까, 순간순간의 경험을 쓸모있는 정보로 남기자면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은 새로 사지 않고 집에서, 주변을 수소문해서 구했어요. 배낭여행자이기에 꼭 필요한 것만 가볍게 챙겼어요.
<태국여행에서 유용한 준비물>을 소개합니다.



1) 플라스틱 밀폐 용기. 약간 크다 싶을 정도의 깊은 형태. 가지고 다니기에는 납작한 것이 편하지만 (밥, 국수, 빵, 간식 등) 여러 종류의 음식을 담기에는 깊은 것이 좋았어요. 집에서 안 쓰는 것을 가져갔습니다.

2) 스테인리스 젓가락. 포크, 꼬치 대용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어린이용이라 길이가 짧아 밀폐 용기에 딱 맞게 들어가서 따로 케이스를 가져가지 않았어요. (제 인생 첫 젓가락입니다)

3) 티스푼. 아이스크림 및 각종 디저트 먹을 때 대부분 플라스틱 스푼을 제공하더라구요. 애초에 챙겨가지 않아 방콕 친구네에서 가장 가벼운 티스푼을 하나 빌렸습니다. 스무디 먹을 때도 유용하고, 길거리 노점에서 밥 먹을 때 쓰기도 했어요.

4) 가벼운 접이식 장바구니. 원터치로 쉽게 꺼내쓸 수 있는, 부피가 작고 가벼운 것이 좋습니다. (2006년 일본 친환경상품박람회에 견학 가서 받은 것으로, 형태와 재질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낡았지만 계속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5) 무늬가 있는 크기가 넉넉한 손수건 3장. 손수건 본연의 역할 외에 한 장은 밀폐 용기에 넣고 다녔어요(젓가락과 티스푼 덜그럭 소리 방지). 채소, 과일이나 빵 등 음식을 싸기도 하고, 보자기처럼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얼룩이 생겨도 걱정 없도록 알록달록한 것으로 모두 안쓰는 것을 선물 받았습니다.

6-1) 입구가 넓은 텀블러.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받아 마신 뒤 씻기 편리합니다.
6-2) 밀폐가 잘되는 작은 텀블러. 물을 담고 다녔고, 일행이 생기면 종종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두 개 모두 서울 연희동의 일회용품 없는 카페 <보틀팩토리>가 시민들에게 기증받은 것을 재기증받았습니다.

7) 얇고 가벼운 에코백. 위의 7가지 아이템을 모두 넣고 다녔습니다. 얇아서 세탁이 간편하고 건조도 빠릅니다. 크기도 넉넉해서 장바구니 역할을 함께 했어요.

빨대 없이 마시는 것에 익숙하기에 다회용 빨대는 가져가지 않았고, 숙소의 주방에서 설거지할 요량으로 수세미와 세제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샴푸와 바디워시는 오래전에 받은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리필해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쓰려고 해요.

한정된 기간에 한정된 품목을 정해 줄이려는 것은 확실히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산술적으로도 간단했어요. 물, 음료 등 마실 것이 담긴 플라스틱 용기를 하루에 2개만 써도 한 달이면 60개, 음식 등을 담는 비닐봉지를 3장만 받아도 한 달이면 90장...! 텀블러와 밀폐용기, 장바구니만 챙겨 사용해도 그 숫자를 0에 가깝게 만들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태국어 필수 회화>를 준비했습니다. 그 덕에 도전의 순간은 언제나 웃음과 호의로 가득했어요. 정말 덕분에 여행이 무척이나 풍요로워졌어요.



당장 엄두가 나지 않아도, 천천히 시도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도 우리는 여행을 계속할 테니까요.

▶이렇게 시작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여행지에서 ①쓰고 버리는 것을 인식한다 ②남들이 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③한곳에 쌓인 쓰레기가 저 정도라면... 이 동네, 이 나라, 지구 전체의 스케일을 상상해본다.

▶아무런 준비물없이 빈손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 ①빨대 없이 마시기 ②봉투 없이 물건 구입하기, 한 장의 봉투에 최대한 담기

▶일회용 없는 여행을 결심을 했다면
여행 전 ①나의 소비 패턴에 주목한다(지난 여행 사진을 찾아본다) ②줄일 아이템을 정한다(일회용 비닐봉지, 종이봉투, 빨대, 일회용컵, 생수병 등) ③현지언어를 준비한다(빨대는 필요없어요, 봉투는 필요없어요 등)



형편없는 살림꾼의 여행은 계속 됩니다!